문종(文宗) (1450∼1452) |
정치 | 화차(火車) 제작(1451) |
사회/경제 | -세종의 영릉 조성(1450) -각도에 도회(都會)를 정함(1450) -숭례문 중수(1451) -진관사(津寬寺)-수륙사(水陸寺)창건(1451) | |
문화 | -양계(兩界)지도제작(1451) -고려사(高麗史)완성(145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편찬(1452) -세종실록편찬시작(1452) |
2.문종의 제위 기간
재위:1450.3~1452.5(2년 3개월)
치세:1414~1452
3.문종에 대한 국민의 반응
워낙 일찍 죽어서 말이죠. 반응이 그리 많진 않았어요.하지만, 어질고, 인자했죠.
그의 묘호에 文(글월 문)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요.
추가(문종의 가계도)
추가(문종의 정식 명칭)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추가(문종의 능--현릉)
▲문종의 능인 현릉
현덕왕후와 문종이 같이 매장되었다.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번지
동구릉 경내에 있다.
고려 제11대 왕(1046~83 재위).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 제8대 현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이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고,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다. 그의 형인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정종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하자 시중 최충(崔沖)에게 명해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에 대한 상세한 고정(考定)을 가해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1049년(문종 3)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1050년 재면법(災免法)·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 등을 마련했다. 1062년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 1063년에는 국자제생(國子諸生)의 고교법(考校法) 등을 제정했다. 1069년에는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해 전답의 세율을 정했으며, 그뒤 녹봉제(祿俸制)·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집권적 지배체제의 중요한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독실히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했고, 왕자 후(煦:대각국사 의천)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했다.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十二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지방통치제도도 문종 때 이르러 양계(兩界)에 방어사·진사·진장의 수가 늘어나고 남방의 제도(諸道)에서는 지주부군사·현령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북편에 침입하는 동여진(東女眞)을 토벌했으나 나중에는 회유책을 썼다. 특히 송(宋)나라와는 국교를 열어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문종 재위기간에 고려의 문물제도는 크게 정비되었고, 불교·유교·미술·공예 등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비문은 그의 친필이다. 능은 경릉(景陵)이며, 시호는 인효(仁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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