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이산1776-1800

조선 22대왕 정조

숯두루지 송회장 2012. 4. 1. 11:49

조선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정조대왕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끔찍히 존경했습니다. 억울하게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지에 대한 효행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성심 또한 지극정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경기도 수원)에 모시고 능행을 자주했다 합니다.
 어느 날 점심을 마치고 한가한 시간을 갖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를 치며 소나기와 우박이 심하게 쏟아졌답니다. 이때 갑자기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생각케 되었는데 '난 아버지 덕분에 호의호식하며 천하를 호령하는데 지하에 계신 아버지는 얼마나 추우실까? 그런데도 능참봉 이란 놈은 아버지 산소를 지키기는커녕 술이나 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낮잠이나 잘게 아니냐' 라고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어 갑자기 능행을 지시했답니다

 그 전날 저녁에 능참봉이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사도세자 능 앞에 엎드려 있기만 해라' 해서 그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비를 맞으며 엎드려 있었답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능에 거의 당도했는데 멀리 아련히 능 앞에 사람이 있는 겁니다. 다가가 보니 술이나 퍼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낮잠이나 잘 줄 알았던 능참봉이 아버지 능 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복한 정조대왕은 그 자리에서 즉시 능참봉을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으로 승격시켜 능참봉은 벼락출세를 했다고 합니다. 일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심을 되돌아 보게 하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조대왕의 업적]

 

1.규장각 설치

-기존의 여러학문 연구소의 기능을 병합하여 일원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왕실도서관으로 창덕궁에 설치하였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출신들을 검서관에 등용하였다(1779)

 

2.초계문신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당하관 이하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등용하였다.

통상 37세 이하 과거급제자가 선발되었으며 초계문신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3.수원 화성 축조

-정조 13년 수원 화산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4.수령의 권한 확대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5.대전통편 편찬

-1785년 법전 재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집권체제를 확림합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6.신해통공

-영의정 채제공의 건의에 의해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고, 이로써 사상의 자유로운 시장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7.저수지 축조

-저수지 축조와 관련된 제언절목을 반포하였고, 수원화성을 개발하면서 대유둔(국영시범 농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만석거. 축만제 등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8.활자의 주조(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정리자)

-도합 80여만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배치하여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9.천주교에 관대

-정학인 성리학이 제 기능을 다하면, 서학은 저절로 없어질꺼라 보고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산사건이 일어났을때에도 사건을 크게 확대하지 않았다.

 

10.남인의 중용

-사도세자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계열의 시파등을 중용하였따. 시파들의 대부분은 영조대에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었다.

 

[정조대왕의 명언]

낮에 한 일을 밤에 스스로 점검해 보아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많거늘

어떻게 평생 동안 한 일이 자기의 마음에 다 만족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잠시라도 놓아 버려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줄곧 구속만 해서도 안된다

잠시라도 놓아 버리면 달아날 우려가 있고 구속만 하면 가로막히는 폐단이 있으니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이 점을 잘 살펴서 두가지 공부를 병행하여야만 한다.

 

산보다 더 높은 게 없고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이 없지만 높은 것은 끝내 포용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다는 산을 포용할 수 있어도 산은 바다를 포용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슴속은 진실로 드넓어야지 한결같이 높은 것만 추구해서는 안된다.

 

내가 깊이 경계하는 것은 '쾌快' 한 글자에 있나니 매사에 만약 쾌락을 ?으려 한다면 후회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산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마지막을 잘 경계하였기 때문이고 평지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시작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진실로 드물지만 처음을 잘하는 것도

어렵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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