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1392-1398

조선 1대왕 태조

숯두루지 송회장 2012. 3. 29. 03:26

 

출생과 가계

태조 이성계는 1335년 음력 10월 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관리를 지내던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채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 고 한다. [3]

그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인 완풍대군 원계(元桂)와 역시 어머니가 다른 이복 동생 의안대군 화가 있었다.

유년기

어릴때에는 화령과 함주근처에서 살았다. 그 당시에 북방 민족들이 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한 매를 얻고싶다"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1356년(공민왕 5) 유인우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고려의 함주 지방(함경도 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362년 그는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장수만 골라 쏘는 맹공을 펼쳐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까지 참살하고 수도에 제일 먼저 입성해 탈환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1362년 심양행성 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 (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 정부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 요동에 있는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고려 말

왜구 격퇴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고려를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라고 하는 소년이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들어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위화도 회군

정치적 동지 포은 정몽주
(후에 역성혁명과 온건혁명의 방법차이로 정적이 된다.)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우왕 때(1388년)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중국원나라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요동 정벌을 논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성계가 진군하다가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하기 전에 장맛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초

조선의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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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동지 삼봉 정도전

 

역성 개혁파는 이성계와 연결하여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었다. 1388년의 1차 요동 정벌 당시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하였지만, 이들 혁명파는 그해 어린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차지했다. 1392년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뒤이어 정몽주가 숨을 거둔 지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퇴위 이후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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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건원릉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정종마저 곧 물러나고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사후

그는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정안대군 방원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바로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의 칭제건원 직후 황제로 추존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가 되었다. 이때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은 삭제하였다.


가족 관계

  • 부 : 환조 이자춘
  • 모 : 의혜왕후 최씨
  • 정비 :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 진안대군 이방우(鎭安大君 李芳雨)
    • 영안대군 이방과(永安大君 李芳果) : 조선 정종
    • 익안대군 이방의(益安大君 李芳毅)
    • 회안대군 이방간(懷安大君 李芳幹)
    • 정안대군 이방원(靖安大君 李芳遠) : 조선 태종
    • 덕안대군 이방연(德安大君 李芳衍)
    • 경신공주 (慶愼公主), 하가(下嫁) 정사좌명공신 상당부원군 이애(定社佐命功臣 上黨府院君 李薆)
    • 경선공주 (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淙)
  • 계비 : 신덕고황후 강씨(神德高皇后 康氏)[5]

    •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 경순공주 (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開國功臣 興安君 李濟)
  •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
  •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김해기생 칠점선)
    • 숙신옹주 (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 홍해(唐城尉 洪海)
  • 후궁 : 성씨 미상
    • 의령옹주 (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 이등(啓川尉 李䔲)

강씨 소생 왕자에 대한 총애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다. 이는 고려의 관습이 서울 출신 경처와 지역 출신 향처 라는 두 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일찍 사망하고 신덕왕후는 그가 1392년 7월 출정을 머뭇거릴 때 갑옷을 입힐 정도로 그의 건국에 기여했다 한다. 그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혹은 정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신덕왕후가 대전 뒤에서 곡을 하는 바람에 대신들이 방석을 택했다고 한다.

한씨 소생의 다른 아들들은 불평이 심했는데, 특히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며 정몽주 등을 제거한 실질적인 건국의 공신인 다섯째 이방원의 불만이 제일 심했다. 그의 강씨 소생 아들들에 대한 편애는 후일 정안대군에 의한 방석, 방번 살해사건의 원인이 된다.

기타

회룡사 전설

1401년(태종 1)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1394년정도전(鄭道傳)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성계탕 설화

돼지고기와 관련해서 경기도 개성 지역에는 돼지고기를 가리켜 성계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다. 태조가 직접 지시한 것의 여부는 불확실하나 고려 멸망 후 수많은 고려의 왕족들이 개성강화도 앞바다에서 실족사와 익사 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고려 말부터 개성사람들은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개성 왕씨와 고려의 절신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수도 역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 사람과 평안도 사람들은 '위화도 회군'으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최영 장군은 무속의 신이 된다. 그런데 일부 최영 장군 제사 때는 집돼지 혹은 멧돼지를 통으로 삶아서 제물로 바쳤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통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는데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통 돼지를 칼로 도려냈다. 또한 개성과 평안도 지역 전설에는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돼지탕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기해년생(己亥年生)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이연계와 이원계

그의 이복 형 이원계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는 1388년 죽으면서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