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세조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다 쿠테타로 집권한 군주라는 것이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었고 두 동생을 죽였으며, 형을 귀양 보냈다.
세조는 정상적 헌정질서를 통해 왕이 된 단종을 명분없는 쿠테타로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그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둘에게는 크나큰 차이점이 있다. 태종은 자신을 도운 공신집단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이러한 숙청으로 인해 태종의 자손들은 깨끗한 조정을 물려받았고 자신의 철학과 소신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반면 세조는 달랐다. 그는 공신집단을 제거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그의 자손들은 강력한 공신집단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1. 세조와 권력을 나누어 가진 공신집단
세조는 자신의 왕위계승을 도운 공신들에게 막대한 혜택을 주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이 있었다. 이처럼 공신집단은 법위에 존재하는 거대한 특권집단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공신집단과 권력분점을 생각했다. 이른바 원상제가 그것이다. 원상제는 세조13년 명나라 사신이 오자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했다. 원상제로 인해 조선은 세조와 공신들이 함께 다스리는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
세조는 이 막강한 공신집단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명분없는 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세종의 장손이고 문종의 장남이었던 단종을 폐위시키고 집권한 세조는 명분없는 정권의 취약성 때문에 공신집단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것이 태종처럼 세조가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이유였다.
대신 세조는 공신집단을 견제할 새로운 정치세력을 육성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귀성군 이준, 남이 등을 적개공신으로 책봉해 한명회, 신숙주 등의 정난공신,좌익공신등을 견제하게 한 것이다.
세조는 구공신(좌익공신) 과 신공신(적개공신)을 적절히 견제시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이었다.
2. 예종과 공신집단의 대결
2.1. 신공신의 몰락
세조가 죽고 왕위에 오른 예종은 이 공신집단 해체를 시도했다. 예종이 먼저 손을 댄것은 신공신이었다. 유자광의 고변으로 시작된 남이의 옥사는 정확한 증거없이 이루어졌으나 결과적으로 남이, 강순 등의 신공신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끝이 났다. 신공신의 몰락은 예종과 구공신의 합작품이었다.
남이의 옥사가 끝난 이후 익대공신이 책봉되었는데 이때 한명회와 신숙주는 1등공신에 책봉이 되었다. 이는 구공신 세력이 신공신을 제거하기 위해 남이의 옥사를 계획했음을 의미한다.
예종은 남이를 제거함으로써 공신집단의 한축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집단을 이루고 있는것은 구공신이었고, 예종은 신공신을 몰락시킴으로써 구공신을 견제할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것이었다.
2.2. 예종과 구공신의 대결
예종은 공신집단의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초 예종은 공신,종친의 분경을 금지하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문신의 집에는 사헌부 관리들을 무신의 집에는 선전관을 파견해 분경여부를 감독했다. 이로인해 예종 즉위년 10월 19일 공신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가 대거 체포되었다.
신숙주의 집에서는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이 보낸 김미가 체포되었고, 김질의 집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이 보낸 주산이 체포되었다. 이외에도 귀성군 이준, 병조판서 박중선, 이조판서 성임의 집들 드라는든 분경자들도 체포되었다.
신숙주는 "박서창이 글을 보내 위문하면서 표피 한장을 보냈기에 받지 않았으나 김미가 체포된 것" 이라며 해명했다. 그러나 예종은 신숙주의 해명에도 사건을 종결짓지 않았다. 예종은 이들을 직접 국문하면서 공신집단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종은 함길도 관찰사가 보낸 김미를 꾸짖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을 섬기느냐? 작년에 그 도(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이 의혹해 관찰사, 절도사,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
- 예종실록 -
형식은 김미를 꾸짖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인사청탁을 받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예종이 분경자들을 직접 국문한 여파는 컸다. 국왕이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공신들은 분경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예종은 공신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한 후 백성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두배였고, 보통이 서너배 였다. 이를 통해 공신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대납으로 말미암아(권세가는)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 예종실록 -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이런 대납을 전면금지 시켰다. 닷새후 예종은 "이제 대납을 금했는데도 수령이 전과 같이 수렴한다면 더욱 가혹한 것으로서 능지함이 가하다" 라고 선포했다. 대납을 허용하면 수령을 찢어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예종 1년에는 공신들의 면죄특권에도 손을 댔다. 그해 4월 예종은 "금후로는 무릇 군무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을 막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 재신, 공신이라도 본율에 의거하여 처벌 하도록 했다.
예종의 분경금지, 대납금지, 공신의 면죄 특권 제한에 대해 백성들은 환호하며 큰 기대를 품었다. 반면 공신들은 예종의 공세에 분노했다. 세조가를 왕좌에 올린 자신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종과 공신집단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던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3. 예종의 급서와 음모
예종의 병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종1년 11월 18일이었다. 이때 기록은 예종이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틀전 예종은 후원에 입직한 군사들을 직접 열병했고, 사흘전에는 전라,경상,충청도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무뢰배들이 산야에 모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부도한 일을 자행한다. 빨리 계책을 내려 체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예종이 죽기 하루전인 27일에는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가 예조 정랑 신숙정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평관 동구에서 낭장가로를 기다렸다가 체포해 가두되 마금파로(다른 여진족)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 는 구체적 지시를 내린다.
이처럼 죽기 하루전 까지만해도 정사를 돌보았다. 그런 예종이 28일 급서를 한 것이었다.
임금이 급서를 하면 조정이 발칵 뒤집혀야 정상이다. 그러나 조정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당일 자을산군을 즉위시켰다. 문종이 세종 승하 엿새후에 즉위하였고, 단종이 문종이 승하한 나흘후에 즉위한 것과는 대조된다.
더더욱 의문이 가는 것은 예종이 승하한 새벽 승정원에 신숙주, 한명회 등 8명의 원상이 있었고 이들이 사정전에 모이자 승전색 안중경이 예종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예상이라도 했듯이 원상들은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에게 정희대비에게 이를 아뢰게 했다. 정희왕후는 예종의 장남 제안대군도, 세조의 장손 월산군도 아닌 한명회의 사위이자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을 했다. 여기에 원상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성종실록은 "이날 위사를 보내 자을산군을 맞이하려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 대궐안에 들어왔다." 고 적고있다. 이는 정희왕후와 공신세력 사이에 사전 의견조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종사후에 자을산군을 다음 왕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예종이 죽은날 원상들은 예종을 죽음이라도 예견이라도 한듯 한자리에 있었고 차기왕으로 제안대군도 월산군도 아닌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다.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무엇보다 예종이 거대공신집단과 긴장관계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게 한다. 예종사후 권력은 공신집단이 독차지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4.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
예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자신의 철학과 소신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뜻은 컸지만 힘이 부족했다. 성종 역시 그처럼 공신집단과 갈등관계 였지만 사림파를 이용해 견제하게 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정조는 노론이라는 거대집단과 맞서기 위해 24년 재위기간동안 대항마로 남인을 키웠다.
예종의 가장 큰 실수는 신공신을 몰락시킨 것이었다. 예종은 신공신을 이용해 구공신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야 했다. 신공신이 몰락한 조정은 구공신이 장악했고, 예종은 지지세력 없이 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의문을 남긴다. 그가 죽은날 원상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도 그렇고 임금이 갑자기 죽었는데 모든것이 마치 예정된 일인냥 진행되는 당시의 기록을 봐도 그렇다.
조선 역사에서 그는 1년반 밖에 안되는 재위기간 때문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세조와 성종을 잇는 군주일 뿐이었다. 그러나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남긴 거대공신집단의 특권과 횡포를 근절시키고자 했던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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