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14년(1388년) 조정에서는 찬반양론 끝에 요동 정벌의 논의가 정하여져 출병을 결행하게 되었다. 명나라에 대하여는 극진히 대국으로 예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로 사소한 이유를 들어 괴롭혀 오든 끝에 갑자기 철령위를 설치해서 방성총관부(함경도영 이북의 땅)를 설치하겠다고 수차례에 걸쳐 통고해 옴으로서 조정에서는 과거 백년동안이나 원나라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선례를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하여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일전을 결정하여 부당한 요구를 철회시키고 태조 이래 (고려) 숙원이였던 옛 강토 회복도 이룩하려는 의도로 우왕과 최영의 강경책으로 요동정벌을 결행하게 된 것이었다.
이 거사야 말로 그 때로서는 국운을 건 일대 모험사 이었다. 이에 조민수는 최영의 권(勸)과 발탁으로 정벌군의 좌군도통사에 임명되여 우군도통사인 이성계와 함께 약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해 4월에 출정의 길에 올랐는데 심덕부 이하 12명의 장군은 좌군에 속했고 정지 이하 15명의 장군은 우군에 속했다.
좌우군이 진군하 여 압록강 위화도에 주둔할 때 마침 장마철이라 강수가 범람하여 강을 건너기 어렵고 장마에 길이 막혀 군량 수송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장마철에 활(弓)의 아교가 녹아 싸움이 불편하며 하계역병(夏季疫病)이 군중에 유행하여 사기가 부진하니 좌우군도통사는 양차에 걸쳐 회군을 승낙해 줄 것을 상신하였으나 불윤(不允)됨으로 이성계의 제의에 의하여 회군을 결행하게 되었다.
이 때의 회군하게 된 상황을 약술하면,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앞서 출군하기 전부터 몇가지 이유를 들어 출군불가론을 주장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아 내심 불만을 가지고 정벌의 길에 올라 섰는데 위화도에 이르러 강수 때문에 더 진격하지 못하고 주군(駐軍)하게 됨에 예하장병에 열론(說論)하되 만약 대국을 범하여 천자(명나라 황제)에게 죄를 범하게 되면 국가와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군을 돌이켜 우왕측의 망녕된 신하 최영을 제거하고 사직과 생경(生炅)을 보전함이 가(可)타고 선동하고 우군 휘하 제장과 회군할 계책을 스스로 정함에 진중(陣中) 어디에서인지 금왕(今王)은 위왕(僞王)이라는 무설(誣說)과 목자(木子) 위왕(爲王)이라는 참언이 퍼트러저 구구상전(口口相傳)하여 군심이 부동되고 도망병이 속출하였다.
야간에 이성계는 스스로 말을 타고 좌군진중으로 조민수를 심방하여 왈 우리 우군은 이미 회군키로 결정하였으니 좌군도 이에 응하여 주도록 권하면서 홀로 갈 수 없으므로 동의를 얻으려 왔노라 하며 만약에 만류 지체한다면 군중의 변란을 막을 길이 없겠다고 반위협(半威脅)조로 말하매 조민수는 묵묵히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이성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 내심 생각하기를 왕명을 어기고 회군한다는 것은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겠으나 만약 이성계의 결심에 반대하여 좌우군이 서로 내전을 하게 되면은 더 큰 불측지사가 필지(必至)할 것을 우려하고 차제에는 이성계 정략대로 회군하는 데에 응하였다가 다음의 다른 기회에 그 야망을 꺾을 수 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마지못해 눈물을 글썽이며 응낙하니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여 왈 지금의 우왕은 혼미하고 황탕하니 폐출하고 종실 중에서 현자(賢者)를 선택하여 왕으로 모시자는 뜻을 은근히 시사하였다.
이에 정벌군은 주야로 반군하여 개경을 포위하니 최영은 성중잔병(城中殘兵)을 모아 역전방 어(力戰防禦)함에 조민수는 차마 공성전(攻城戰)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음은 그로서는 당연지사라 하겠다. 드디어 이성계와 그 휘하의 맹공으로 개성을 함락하고 최영을 색출하여 고봉현으로 귀양보내고 최영에 협력하였던 부하는 모조리 처치하고 우왕을 강화로 추방한 뒤 신왕을 세우게 되매 조민수는 좌시중이 되고 이성계는 우시중이 되었다.
이 때 조민수는 신속히 이색을 만나 상의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을 신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때 이색은 거유로서 국내에 명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이에 불만하여 회군시의 약속을 어찌 어기냐 하매 조민수는 정색하며 전왕의 자로 왕위를 계승케 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냐고 하고 끝까지 창왕 옹립을 관철한 것은 이성계의 야심을 선제키 위함이라 하겠다.
이때 창왕의 나이는 겨우 9세였음으로 기록에는 없으나 공민왕비인 정비가 섭정비슷한 후견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창왕은 조민수와 이성계에게 충근량절선위동덕안사공신호를 내리고 조민수는 양광, 전라, 경상, 서해, 교주도 도통사를 겸직케 하고 이성계로는 동북면 삭방, 강원도 도통사를 겸직케하여 일국의 내정과 병마지휘권을 나누어 장악케 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민수는 이성계의 선임이요 우위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이성계 일파는 자파의 뜻을 묵살하고 창왕을 세우는 것이 몹시 불쾌하기 짝이 없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창왕이 지금은 어려서 별로 하잘 것 없는 존재이지마는 장차 성장하여 강력한 군주가 된다면 조민수는 몰라도 이성계 일파의 앞날은 예측키 어려울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계 일파는 자파를 요직에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다방면으로 세력을 굳쳐가면서 당시 창왕을 옹호하는 유일한 무권 소지자인 조민수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전제개혁의 논의가 이성계 일파에서 일기 시작했다.
물론 전제를 개혁하여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국고수입을 튼튼히 해야할 필요는 있었다.
선년(先年)에 공민왕도 이를 힘썼으며 우왕 때에 조민수가 문하시중에도 세수개혁 등 다소 시도한바 있었으나 왕의 무관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성계 일파가 들고 일어난 전제개혁론은 명분은 좋으나 그 실(實)의 속셈은 사전(私田)을 혁파몰수함으로써 왕실에 충성을 다하면서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적 야심을 견재하는 수구파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 뜨리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서 자파의 목적을 달성하려는데에 더 큰 의도가 있었으므로 이를 간파한 조민수를 비롯한 근왕파는 너무 급속한 개혁은 오히려 사회의 혼란을 조장할 뿐이니 서서히 부작용 없이 개선해야 한다고 반대하였다.
이 반대에 동조한 편은 이색, 이림, 권근, 이숭인, 우현보, 유백유 변안열 등 수구근왕파요, 전제개혁에 적극 찬성한 편은 조준, 정도전, 윤소종, 남은, 조인옥 등 주로 이성계의 무력을 중심으로한 신진파들이었다.
드디어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성 조준이 조민수는 전민을 수탈겸병하여 탐욕스러우며 사리를 위하여 전제개혁을 저지한다고 탄핵하여 변방으로 유배시키고 말았다.
조민수가 유배된 시기에 대하여는 "고려사"에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바로 다음달인 7월로 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대하여는 석연치 못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뒷장에서 다시 재론키로 한다. 아무튼 전제개혁을 놓고서의 수구근왕파와 신진혁명파와의 대립에서 조민수가 실각하였다는 것은 근왕파중의 유일한 무장이 없게 되었으니 무력의 보첩(保疊)이 무너진 셈이 되므로 수구파는 그만큼 약세가 되고 혁신파는 상대적으로 강화된 셈이 되어서 대세는 더욱 급진전하게 되었다.
조민수를 축출한 뒤 창왕 2년(1389년) 7월에 이성계는 도총중외제군사를 겸하여 전국의 병권이 오로지 그의 한손에 쥐게 되었으므로 천하에 못할 노릇이 없게 되었다.
조민수가 물러난 후 좌시중의 자리는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되었으나 그는 덕망과 학문은 뛰어난 인물이였으나 무력은 없었다.
이와 같이 종래의 질서가 무너지고 실력이 활개치는 판국에는 무력이 없는 문관은 어쩔 수 없 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를바 없다.
그러던 중 3개월 후인 창왕 2년(1389년) 11 월에 뜻밖에 김저 사건 곧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쫓겨 갔던 우왕은 이 무렵 여주에 옮겨져 있었다. 군사들의 감시를 받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대접해서 생활에는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에 대해서 감정이 좋을리 없었다.
때마침 죽은 최영의 친척 김저와 정득후가 여주로 우왕을 방문했드니 우왕은 이성계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고 한자루의 칼을 내주면서 옛날 자기 심복이였던 곽충보에게 전하여 힘깨나 쓰는 그더러 이성계를 없애버리라는 것이었다. 칼을 받은 곽충보는 그길로 이성계에게 달려가 사실을 고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득후는 자살하고 김저는 붙들려 문초를 받았다.
김저의 공술(供述)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성계 휘하에 모사들이 조작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연금상 태에 있는 우왕에게 칼이 있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더구나 그것을 자유로히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납득이 안간다는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눈밖에 난자는 누구든 숙청할 구실이 생겼다.
12월 14일 이성계는 휘하 병력을 흥국사에 집결시켜 대대적으로 시위하는 가운데 중신들을 여기에 불러 회의를 열고 "우왕은 공민 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니 그 부자는 왕위에 앉을 수 없다"고 공언하였다. 우왕 신씨설은 얼마전부터 그 심복들이 속삭이고 다녔으나 그의 입에서 직접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우왕은 14년 창왕은 1년 도합 15년을 임금으로 깎듯이 섬겼으면서도 하루 아침에 가짜 임금이라고 하니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 위세에 눌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서 새임금이 될 사람으로 결정된 것이 신종의 7세손인 정창군 요(瑤)였다.
그는 종실근친도 아니였으나 그 아우 정양군 우는 이성계의 아들 방반의 장인이니 말하자면 이성계와는 사돈 간이였고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저 나서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썼으나 이성계로 봐서는 기왕 들러리로 세울 바에는 적격이였으므로 재비를 뽑는 촌극까지 벌리면서 기어코 내세웠다.
다음날 아침 즉 11월 15일 이성계는 심복을 거느리고 왕대비인 정비궁에 나가 미리 마련한 교서를 받쳤고 대비는 시키는 대로 읽어 내려갔다.
요컨대 우왕 부자는 신씨로 가짜 임금노릇을 했으니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정창군 요를 임금으로 세운다는 내용이였다. 이 교서가운데 가짜 임금 창왕을 세운 책임을 조민수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이악계악(以惡繼惡)이 나 권병소귀(權柄所歸)에 세졸난거(勢卒難去)라」 고 하였다.
이 자리에 억지로 끌려나온 요는 굳이 사양하는 바람에 왕대비가 손수 옥새를 쥐여 주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공양왕이다.
드디어 우왕은 강릉 창왕은 강화도로 귀양갔다. 마음에 안드는 자는 모조리 귀양보내고 이색과 그 아들 이종학은 물론 권근도 가짜 임금을 두둔했다 하여 파면되었으며 옥중에 있던 사건의 장본인인 김저는 영원히 입을 봉하기 위하여 죽여 없애고 다음 달인 12월에는 형식상 공양왕의 명으로 강릉과 강화도에 각각 사람을 보내어 우왕과 창왕을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판국이 이렇게 되니 조민수도 무사할리 없었다. 사헌규정(司憲糾正)인 전시 (田時)를 창녕으로 보내어 조민수를 국문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사개월 전인 8 월에 아직 창왕이 왕으로 있을 때 그 생일에 조민수를 특별 사면으로 귀양에서 풀리어 고향에서 살고 있던 중이였다. 이때 조민수의 죄명은 가짜 임금인 창왕을 세웠다는 것이였고 이색, 권근도 창왕을 세우는데 공모했다는 공술(供述)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조민수는 수삼일(數三日)을 고문받으면서도 창왕을 세운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고술(固述)하였다고 했다. 드디어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다음 해인 공양왕 이년(1390년) 2월에 삼척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며 이색 부자와 권근 등도 다 귀양길에 떠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성계는 허수아비와 다름없는 공양왕의 어명을 빌어서 왕족이고 거치장스러운 존재들은 가차 없이 숙청하여 빈틈없는 기반을 쌓아갔다.
그 뒤의 조민수에 대한 조치는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취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성계 일파 일색으로 짜여진 태간(台諫)이나 헌사(憲司)에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어 가며 상소하여 (교장상소(交章上疏)) 조민수를 극형에 처하도록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은 어찌된 셈인지 허락치 아니하고 이미 조민수에 대하여는 상응의 조치를 하였으니 다시는 더 고집부리지 말도록 태간(台諫)들을 타이르라고 이성계와 심덕부에게 부탁한 바가 있었으며 그해 (1390년) 4월에는 공양왕이 위화도의 회군공신을 사십오명 녹공하는 가운데 조민수 이름만을 빼놓을 수 없었든지 이성계와 함께 일등공으로 기록하였다.
그 후 어느 때에 귀양 유배지에서 풀렸는지 기록에는 없으나 고향인 창녕에서 그해 (1390년) 12월에 파란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 "고려사"에는 되어있다.
그러나 조민수의 졸거한 사항에 관하여는 그 혈손인 창녕조씨 화순파문중에 자고대대 (自古代代)로 전래한 바 사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에 의하면 세세구전으로 조민수의 최후는 와석종신(臥席終身)이 아니라 자객에 의하여 암살된 것으로 전한다. 언제 어떤 자객(刺客)에 의하여 암살된 것 인지 확실치 않으며 이조 중엽이후 18세기에 발간된 그 파의 족보에 비로소 경위이태조소해(竟爲李太祖所害)」 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조 초기에는 구전만 해오다가 말엽에야 비로소 단 몇 글자 기록에 남겨 놓은 것은 이씨조정하의 시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389년 11월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으로 세웠다. 12월에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이색 부자를 파면하는 한편, 관제를 개혁했다. 1390년 정월 조민수와 권근을 유배 가게 만들었다. 이 숨 가쁜 시기, 아마도 공양왕 2년(1390년)경 이방원은 왕명을 받아 마리산에 오른 기회에, 혁명의 일정을 모두 구상했을 것이다. 1391년 정월 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에 올랐다. 1392년 4월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7월17일 이성계는 배극겸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 공양왕을 원주로 귀양 보냈다. 이듬해인 1393년 2월15일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4월에는 공양왕 등 왕씨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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